정의선 공동대표
2016.01.13 12:15

[정의선칼럼]47년 만에 찾은 고마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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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만에 찾은 고마운 분, 특히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으로서는 대단한 은인이었다.

병신년 1월 11일 오후 6시 백화산 입구 ‘천하촌 펜션’은 반가운 손님 접대로 분주했다. 1969년 당시 역사학계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이병도의 국역 ‘삼국사기’에 수록된 삼한 통일의 대업을 기초한 충북 괴산 백화산 설을 뒤집고 상주 백화산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상주의 진산임과 금돌성이 바로 그 현장임을 3차례의 백화산 답사 끝에 확인하고 간행한 ‘상주지구고적조사보고서(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는 상주의 유적들을 널리 세상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백화산 금돌성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역사의 현장임을 확인해주었기에 더욱 반가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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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석좌교사 정영호 박사가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이하 백사모’ 회원들의 백화산 사랑을 격려하기 위해 식사 대접을 먼저 제안했지만 백사모 회원들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마련한 작은 잔치 상을 앞에 두고 여러 가지 소희와 앞으로 할 일들이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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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대담 중인 정영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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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공격로를 경기 이천까지 북상한 신라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회합 후 백제의 수도에서 조우를 기약하며 회군하다 충북 보은 무렵에서 태종 무열왕(太宗 무열왕)은 금돌산성으로 가고 신라 5만 병력은 보은, 옥천을 거쳐 황산벌로 진군했다는 것은 금돌산성 위치를 충북 괴산으로 추론한 점에서 시작하지만 (이병도 국역國譯 삼국사기三國史記 627p - 정영호 박사의 고증으로 인해-동사강목-東史綱目 第4上에 “今 尙州 白華山”으로 주석되고 기타 문헌에서 고증하고 있음) 금돌산성이 경북 상주 백화산으로 새롭게 밝혀짐으로 신라 5만 병력이 상주 백화산에서 진군했음은 틀림이 없다. 이는 단지 태종 무열왕이 잠시 머물다 간 백화산이 아니라 백제 정벌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 통일이 지금도 큰 화두로 우리 앞에 놓인 상황에서 최초의 삼한 통일의 대업을 기초한 백화산 금돌성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큰 족적이 남겨진 중요한 유적이라고 본다.

물론 일부 시각에서는 고구려의 넓은 국토를 포기한 반쪽 자리 통일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당시 백제 의자왕의 혼돈과 고구려의 골육상쟁은 당나라에 나라를 헌납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었기에 통일신라는 삼한 통일의 대업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십여 년에 걸쳐 당나라와 일전을 마다하지 않고 외세를 물리친 것은 높이 평가할 부분인 것이다.

 

- 상주지구고적조사보고서(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를 쓸 당시에도 상주 행정 당국에 이런 역사적 유적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여 길이 후손들에게 잘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간곡히 부탁했는데 아직도 방치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일제에 의해 삭제된 백화산의 이름을 찾고 백화산을 널리 알리며 묻혔던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는 등 꾸준히 십여 년에 걸쳐 활동한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 가득하기에 방문하여 그 뜻을 격려하고자 했다.

 

- 그 옛날 상주는 면적만 광활한 것이 아니라 상주라는 행정, 군사, 문화적인 기능이 나라의 으뜸이요 자랑할 만 했다. 근원이 삼국사기에 등재된 삼한 통일이란 국가적 명제에 기초한 백화산 금돌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생각하여 이를 영원히 보존하고 상기할 목적으로도 국가 사적으로 빨리 지정됨이 마땅하고 성곽 돌들을 이용하여 돌탑을 쌓는 등 훼손을 막는 일을 빨리 시행되어야할 것이다. 끝으로 민간단체로서 문화제를 개최하는 등 백화산을 보존하려는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의 열정에 감동하며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정영호(鄭永鎬)

서울대 역사과졸업. 문학박사,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 한국미술사학회장, 한국범종학회장, 백제왕인박사현창협회장 등 역임.

현재 한국문화사학회장,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성림문화재연구원장,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장 겸 석좌교수로 재직.

주요저서「한국의 석조미술」,「고고미술 첫걸음」,「백제의 불상」,「신라석조부도」,「한국의 석탑」,「도의국사와 진전사」 등 다수.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9), 우현문화상(1981), 만해학술상(2001) 등 수상.

 

 

상주 백화산 학술대회 주제발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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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의 歷史的 考察

 

鄭永鎬 단국대 (檀國大) 석좌교수(碩座敎授).박물관장(博物館長)

 

목 차

1.序言

2.白華山 今突城 관계기록

1)삼국사기(三國史記)

2)동사강목(東史綱目)

3)중산지(中山誌)

3.今突城 現地踏査

1)용문사지(龍門寺址)

2)보문지(宝門址)

3)대궐터

4)내. 외성(內.外城)

4.앞으로의 과제

5.結語

 

1. 序 言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慶尙北道 尙州市 牟東面 壽峯里)에 백화산(白華山) 이 솟아있고 이곳에 석성(石城)으로 금돌성(今突城)이 축조(築造)되어있다.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에 관해서는 상주지역(尙州地域)을 답사(踏査)한 내용(內容) 일체(一切)를 “상주지구고적조사보고서(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 (1969年11月 단국대학교 출판부 간행 檀國大學校 出版部 刊行)로 발표한 바 있으며 여기에 소개하려는 내용(內容)도 이 보고서(報告書)에서 기본적인 자료를 참고하였다.

그리고 금돌성(今突城)의 ‘突’字를 ‘堗’로 표기하고도 있으나 최초의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突’字라 보이므로 금돌성(今突城)으로 통일 표기하였으면 좋겠다.

상주지구(尙州地區)는 삼국기(三國期)에 고구려(高句麗) 및 백제(百濟)와의 접경지역으로 신라(新羅)의 전초지(前哨地)였으며 특히 백제와는 더 많은 지역이 연접되어 있어서 西쪽 변경은 항상 접전지(接戰地)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권지(卷之)28 상주목(尙州牧) 명신조(名臣條)에 “新羅金庾信眞德王時 伐百濟論功 增秩伊餐爲上州行軍大摠管”이라 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사적인 여러 가지 사실을 밝혀보려는 것이 이곳 조사의 큰 목표였기 때문에 상주시로부터 서쪽 지역인 백제로 통했던 길이 어느 곳이냐 하는 것을 시종(始終) 머리에 두고 현지를 답사하였던바 모동면 수봉리의 백화산과 고성지(古城址)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곳에는 금돌성(今突城)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어 신라의 백제 공격과 전승(戰勝)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조사가 될 것이라 추측되어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논제(論題)를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의 歷史的 考察”이라 하였으며 첫째로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의 관계 기록을 찾아보고 다음으로 금돌성의 현지답사 내용을 밝혔다.

그리고 금돌성(今突城)에 관하여 앞으로의 과제를 발표자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 보았다.

 

2.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 관계 기록

 

금돌성(今突城)에 관한 기록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條에

“七年…….七月…….命太子與大將軍庾信 將軍品日欽春等率五萬應之 王次今突城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 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云云 十八日 義慈卒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2) 동사강목(東史綱目) 第4上 庚申

夏六月 新羅王出屯南川停 遺太子法敏及金庾信 會唐兵于德勿島 云云 七月十日…….又遣法敏與 庾信 及 將軍品日欽春 師精兵五萬應之 進次今堗城(今尙州白華山)

新羅王會蘇定方于泗沘城 遣使告捷于唐 王自南川進次突城(今未詳) 聞百濟降 自今突至泗沘 云云

3) 중산지(中山誌)

1969년 상주지구답사(尙州地區踏査) 당시 이곳 玉洞書院을 代表하고 있는 黃遺玉氏 (지금의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 ‘상주항몽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의 사무국장 황인석씨의 엄친)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증언을 청취하여 ‘中山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즉 황유옥씨는 이곳이 고향인데 6.25 동란 전까지는 개인 장서를 많이 소장하였었다 한다.

황씨는 약초도 캐고 수양도 할 겸 가끔 이 백화산(白華山)산을 오르내리기를 수 십 년 간 하였으므로 山 전역을 잘 파악하고 있는바 이곳에는 고성지(古城址)가 있어 본래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때 쌓은 ‘今突城’이 바로 이 石城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였다.

황씨가 이 古城을 주목하게 된 것은 先祖代부터 전해오는 장서 중에서 ‘중산지(中山誌)’ 혹은 ‘중모지(中牟誌)’ 속에서 古城에 관계된 기록을 찾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곳 일대는 본래 新羅 時代의 中牟縣으로 이곳 地方誌를 종합한 책자를 중산지(中山誌)라 하여 인문, 지리, 역사 등 일체를 수록한 縣邑誌였다고 한다.

이 책자는 印出한 것이 아니라 묵기(墨記)한 필사본(筆寫本)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것이었는데 동란 때 다른 古書들과 함께 분실한 뒤로는 찾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씨는 이 중산지(中山誌)를 읽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음을 말하였다.

白華山에는 古城이 있는데 신라시대 김흠(金欽)이 쌓은 今突城으로서 신라 국왕인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이곳에 친히 나와 김유신장군을 격려하여 곧 백제를 정벌하게 하 였다.

이 내용에서 보면 황씨는 白華山의 古城이 今突城이 분명함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황유옥씨의 안내로 白華山 일대를 각 골짝마다 다니면서 모든 유적지를 확인 조사할 수 있었으니 그 중요한 내용들이 용문사지(龍門寺址), 보문지(宝門址), 대궐터, 今突城의 내.외 석성(內.外 石城)들이다.

앞의 세 가지 관계 기록에서 또 동사강목(東史綱目)에 “今突城 今尙州 白華山”이라 하였으며 황씨 증언에서 白華山內의 古城은 분명한 今突城이라 하였으니 나머지 숙제는 현지조사의 내용인 것이다.

 

3.금돌성 현지답사(今突城 現地踏査)

 

모동면 소재지에서 수봉리로 가노라면 洞口에 들어서자 오른쪽 편으로 멀리 백화산정(白華山頂)이 보인다.

玉洞書院은 이 支脈의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는데 바로 앞쪽에 서남쪽으로 흐르는 錦江 상류인 “石川”을 건너 북쪽 계곡을 따라 백화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을 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

石川의 양쪽 對岸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이 山 어구에 들어서면 마치 城門을 지나는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답사의 경로는 이 어구를 지나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외성지(外城址)”를 거쳐 “용문사지(龍門寺址)”를 지나 山 頂上을 향하게 된다. 산 중턱 쯤에서 “내성지(內城址)”를 지나 “보문곡(宝門谷)”으로 올라가서 “대궐터”를 보게 되며 山頂에 올라서 石城을 조사하게 된다.

 

1)용문사지(龍門寺址)

옥동서원(玉洞書院)에서 앞개울을 건너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외성지(外城址)가 나오고 여기서 1.5km쯤 더 가면 왼쪽 보문곡(宝門谷)으로 접어드는 삼각지점이 되는데 절터는 똑 바른 길로 약 1km 더 올라가야 된다.

여기는 동북쪽으로 “샛별봉”이라는 산봉이 솟아있고 그 위 중턱에 병풍바위가 둘러져있는데 이 산골짝의 계류가 절터 옆을 흐르고 있다. 백화산 지맥의 산기슭에 넓은 대지를 마련하여 寺域을 이루었는데 남쪽과 동쪽에 각각 높이 4-5m의 석축을 쌓고 그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했다.

석축은 羅.麗代에 걸쳐 축조했던 형식으로서 큼직한 자연석들을 고르게 쌓았는데 동쪽보다는 남쪽이 더 많이 남아있어서 약 40m 길이의 유구(遺構)를 볼 수 있다.

절터의 地勢로 보면 南向 寺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행한 황유옥씨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기록에는 없으나 옛 부터 용문사지(龍門寺址)로 전한다는 바 현재 모동면 소재지 서북쪽에 보존되어 있는 용호리 3층 석탑(龍湖里 三層石塔)의 원 위치가 바로 이 용문사지라는 것이다.

약 100년 전에 이 자리에서 이 석탑을 현 위치로 移建한 것이라고 先代로부터 전해 들었다는데 이 사실은 마을 사람들도 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1969年 현재)

이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해졌고 火田民 초가집 한 채가 있으며 고려시대의 청자와 기와 편들이 산재한데 밭 가운데에 서있는 석주형(石柱形) 석편(石片) 위에 석탑재(石塔材) 1石이 놓여있어 주목되었다. 황씨의 말에 의하면 석탑을 옮길 때에 결락되었다는 것이나 재고할 필요가 있는 부재이다.

 

2)보문지(宝門址)

용문사 옛터에서 서쪽 골짝을 “보문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보문곡(宝門谷)”으로 그 위에 “대궐”이 있었으므로 그 “入口의 門”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俗名이라고 한다. 이 보문곡(宝門谷)은 산기슭 쪽의 外城으로부터 2km쯤 올라온 중복부터를 말하는데 지금도 이 골짝에서는 양쪽 산등성이로 곳곳에 성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울창한 수림을 뚫고 보문골 마지막 언덕에 올라가면 그곳에는 널찍한 대지가 마련되고 현재 民家가 두 채 있으며 그 위쪽에는 “상세사(上世寺)”라는 작은 山寺가 조영되어 있다.

이곳은 본래 보문암지(宝門庵址)로 추정되는데 모동면 마을에 전하는 문집에 의하면 “宝門庵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그렇게 짐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곳 대지에는 곳곳에 석축자리가 보이는데 그 축대는 근년에 새로 쌓은 것이 아니었다. 현지의 金씨나 동행한 黃씨를 비롯한 현지 일행이 모두 그렇다고 하기에 필자도 조사한바 그렇게 느껴졌다.

“上世寺”는 현재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정순애(65세) 보살이 건립한 곳으로 1945년 광복 후 처음 건물 한 채를 지어 “보문사(宝門寺)”라고 하였는데 6.25 동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 보살의 아들인 오병오(44세), 오병화(39세) 두 형제의 권유로 1956년경에 현재의 건물을 세우고 上世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뜻은 현 위치가 속세에서 멀리 떠난 天上界인 山頂部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승려와 주목할 만한 불상이나 불적들을 볼 수 없었다.

 

3)대궐터

앞서 火田民 초가 金錫寬씨 댁에서 동쪽으로 잡목 우거진 능선을 횡단하여 500m쯤 가면 속칭 “대궐터” 혹은 “대궐안” “궁궐터”라고 불리는 넓은 대지에 이른다.

이 지점은 白華山 정상에 가까워서 사방으로 뻗은 능선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대지는 약간 완만한 곳을 택하여 능선에서 골짝에 가깝도록 축대를 쌓아올려 평지를 마련한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석축은 높이 12m, 좌 ․ 우의 길이가 약 30m이다. 구축 방법은 거대한 잡석을 고르게 쌓아 상. 하단으로 하여 중앙 면은 2단인데 동편은 한 단을 더 설치하여 3단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석재로써 높게 쌓았으므로 보기 드물게 웅장한 석축인데 이러한 축조 방법과 형태는 신라시대에 쌓은 다른 축대에서도 볼 수 있는바 이곳의 석축은 물론 당시의 유적으로서 의심할 바 없으며 이와 같은 석축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게 웅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축조 방식에 있어서도 12m 이상의 높은 면을 이루었는데 이것을 2단으로 쌓은 것은 파손을 방지하고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축의 동남부에 또 한 단을 낮게 마련하여 3단을 이루었고 그 곳에는 內空되게 하여 출입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현재 각 변의 길이 2.16m ☓1.33m , 깊이 2.2m 크기의 4각형 房과도 같은데 그 주벽의 축석 수법이나 석재 등으로 보아 본래부터 경영된 별실(別室)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지에서 이것이 혹시나 대궐을 지키는 경비 초소 등으로 마련된 것이 아닌가도 추측해 보았다. 여하간 이 별개의 석실은 퍽 흥미로우며 앞으로 더욱 고찰의 여지가 있는 특수 구조라 하겠다.

축대 위는 약 300평 되는 넓이인데 밖으로 반쯤은 경작지로 변해졌으며 안쪽은 산사태로 사토와 잡석이 쌓이고 잡초목이 우거졌다. 경작지에서는 古式의 기와 편이 발견되고 柱礎石이 남아있어 주목되었다. 이 초석은 현재 1列5石뿐이나 정연하게 열을 지었는데 크기가 1m ☓ 1.2m 로 큼직한 古式의 4각형 초석이다.

초석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2m-4m이다. 현재의 상태가 원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모양이나 놓인 폼이 목조 건축물의 주초석임은 틀림없는 것이다. 이 대지의 안쪽에는 샘터가 있는데 현재도 물이 솟고 있어서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면 음료수로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렇듯 웅장한 석축과 건물지, 그리고 샘터까지 남아있는 이곳을 “대궐터”라 하여 옛 史蹟을 더듬어 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되었던바 武烈王이 바로 이곳에 陣駐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4)내. 외 석성(內. 外 石城)

白華山은 白華山脈이라 불리어지고 있느니만치 그 주위가 넓고 支脈이 많이 뻗어있다.

그러므로 頂上部로부터 左. 右를 에워싼 稜線을 따라 축성한 石城의 全長은 실로 20km 內. 外가 된다고 하니(?) 그 거창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성곽의 형식은 內城과 外城으로 구별하였는바 白華山 어구에 外城을 쌓고 城門을 마련하였으며(현재는 그 門址라하여 무너진 석재만이 산란하다.) 이 外城은 門址인 협곡의 좌 ․ 우 절벽 능선을 따라 넓은 범위로 축조되었다. 內城은 外城에 들어와서 “보문곡(宝門谷)”에 접어들면 시작되는데 좁은 계곡을 출입문처럼 중앙에 두고 그 양쪽 비탈에 쌓아서 “대궐터”를 중심하여 백화산 상봉 쪽으로 올라갔으며 이 城 줄기는 산 정상부에서 外城과 합치고 있다. 그러므로 “대궐터”에서 보면 이곳을 중심하여 이중으로 에워싼 석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산 정상부 능선의 성곽이 가장 잘 남아있어서 星峰, 內苑山, 恨城峰 등 諸峰의 성 위를 따라 일주할 수 있는데 “宝門” 뒤쪽의 능선에는 “북문지(北門址)”라 하여 北쪽 출입구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곽의 정상부인 恨城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동쪽으로 牟東, 牟西 너머로 상주시내 건너 멀리 淵岳山(甲長山)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壽峰里가 바로 눈 아래에 보이며 멀리 黃澗, 추풍령 쪽이 굽어보인다. 그리고 서쪽은 옥천 너머 대전 땅이 멀리 짐작되며 북쪽은 보은 땅이 바라보인다. 과연 이곳은 이 지역에서는 가장 主山이 되는 동시에 사방을 지키고 또 지배할 수 있는 천연적인 조건을 구비한 요새임을 현지 조사에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대궐터”의 위치는 정상부에 가깝기 때문에 여기서 남쪽 앞을 내다보면 수봉리 일대의 정경이 한 눈에 발 아래로 보이나 사방의 敵情을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궐터가 정상부에 가깝기 때문에 연락은 곧 가능했을 것이며 따라서 진영의 全軍을 통솔함에 있어서도 지장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간 內.外 石城의 규모는 우리나라 최대일 것이며 그 축조 연대는 삼국기로 추정하여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현지 여러분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집약할 수 있다.

즉 이 석성은 언제인지는 모르나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쌓은 성인데 본래의 城名은 “금돌성(今突城)”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는 신라의 국왕인 太宗武烈王이 이곳에 와 있으면서 백제 정벌군을 격려하고 統帥하였기 때문에 “金武王城” 혹은 “金武烈王城”이라고도 불리었다는 것이다.

황씨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이야기는 마을의 구전뿐이 아니라 “中山誌”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산중에는 당시 武烈王이 陣을 쳤던 “대궐터”가 지금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에 신라에서 백제로 가려면 상주를 거쳐 반드시 이곳 앞쪽의 수봉리 넓은 들을 지나 고개를 넘었다고 하는데 그 고개는 지금도 “문바우” 혹은 “석문(石門)“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며 이 고개만 넘으면 곧 황간 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백제에로의 행로가 바로 수봉리 앞들이고 그 경계가 지금도 ”문바우“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고개였다는 것은 이곳 산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중요한 증언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해지는 말만이 아니고 현지를 다니고 있는 황씨의 이야기이니……. 황씨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이 경로를 여러 차례 步行하였다는데 그 길은 지금도 널찍하여 牛馬車가 내왕할 수 있으며 현재의 차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모두 이 옛길로 통했다고 한다.

상주 시내를 떠나서 지금의 내서면 “갈방리”를 지나 모서면의 “대포리”를 거쳐 모서면의 “소정리”에 이르면 지대가 약간 높아지고 다음 동리인 “솔미부락”부터는 평원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서 평탄한 길로 모동면의 “이동리” 혹은 “배울”과 모동면의 “신천”을 거쳐 “수봉리”를 지나면서 약간 언덕진 길을 올라 “문바우” 고개를 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상주 시내에서 이 "문바우“ 고개까지의 거리는 약 30km 내외라 하는데 이것은 현재 신작로 길보다 10여 km 가까운 길인 것이다.

 

4. 앞으로의 과제

 

앞에서와 같이 今突城의 現地踏査에서 용문사지(龍門寺址), 보문지(宝門址), 대궐터, 내. 외 석성(內. 外 石城) 등 諸遺跡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 內容은 1969年의 조사 내용인데 그 후 4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여러 遺跡의 상태가 어떠한지 잘 알 수가 없다.

모동면 반계리의 정의선씨와 이동2리의 황인석씨의 말에 의하면 현재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 “상주백화산항몽대첩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백화산의 역사적 위상, 상주대첩의 새로운 조명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반갑고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의 과제” 즉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큰 숙제가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1956년도부터 시작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를 비롯하여 各種 文獻의 古代史 관계 遺跡, 遺物에 대한 現地踏査 考證의 일환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 그 자리에 설 때마다 간절하였다.

이때에는 우선 地上에 남아있는 遺跡地 와 遺跡들의 存在와 상황파악으로 “地表調査”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당시에는 어색하다는 비판과 저항도 있었으나 이제는 全學界의 공통어로 사용하고 있는 줄 안다.

1969년 당시 白華山 일대를 踏査하면서 四方에 버려져있는 이 유적(遺跡)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보존 대책을 강구하면서 이와 같이 중요한 역사의 現場을 照明할 길은 없겠는가? 하는 생각을 숙제로 남겼던 것이다.

“금돌성 현지답사(今突城 現地踏査)”에서 여러 곳의 유적지를 조사하여 이 유적들에 따르는 구조와 조형 등 모든 상황을 파악하였었는데 4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이들 유적지의 상태가 어떠한지 궁금하다.

1969년도의 현상보다는 변형, 혹은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느 부분이던 原形은 보이고 있을 것이므로 본래의 모습은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안다.

앞으로의 과제라 하면 白華山 일대의 유적지를 재검토하여 원형대로 복원하는 일이 첫째 단계이며 둘째로는 이들 유적의 보존책을 강구하는 일이고 셋째로는 이 귀중한 유적들의 새로운 조명으로 그 가치를 널리 알려야할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숙제를 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언하고자한다.

첫째, 유적지들의 복원 문제

우선 원형대로 복원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적지를 세밀하게 검토하여 원래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 방면의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복원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 어떠한 유적이던 새로이 발견 조사되거나 복원한 유적에 대하여 훼손하지 않도록 보존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과학적인 보존책과 관리가 뒤따라야할 것으로 안다.

셋째, 白華山 유적들의 귀중함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이 산과 今突城의 역사적 위상, 주변의 여러 유적의 중요한 배치와 역할 및 유구 등을 대 ․ 내외적으로 알려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 일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또한 白華山 정상까지 올라 주위 유적들의 역사적 현장을 바라보며 중요한 지역임을 절실히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 도로의 정비, 山行의 통로, 등산로 등의 개척이 필요한 것인바 이곳에는 옛길들이 잘 남아 있으므로 이들 옛길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정비 할 것이며 새로운 통로의 개척은 되도록이면 금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제를 인식하고 풀기 위해서는 실천에 앞서 “소위원회” 등을 구성하여 심사숙고하는 계기가 先行되어야할 것으로 안다.

단 이러한 모임의 구성요원에는 반드시 이 방면 전문가가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5,結 語

 

모동면 수봉리는 忠淸北道 永同郡 黃澗面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추풍령과 연결되는 고개 밑에 위치한 동리로 뒷고개만 넘으면 충청북도 땅이다.

한편 白華山은 主峰인 捕城峰(현재 漢城峰이라 개칭, 표고 933m)에서 사방으로 뻗은 支脈이 각 郡域까지 미치었으므로 하나의 白華山脈을 이루고 있는데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크고도 높은 산이며 이 봉우리로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권지(卷之)28 상주목(尙州牧) 고적조(古跡條)에 白華山 有古石城 周一千九百四尺 內有一溪五泉 今廢 라 있고 산천조(山川條)에 白華山 在中牟縣西 州七十二里 라 보이는 바 이 두 기록에서 白華山의 존재와 옛 석성(石城)이 있으며 城內에는 溪流와 다섯 곳의 샘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동사강목(東史綱目)의 太宗武烈王 관계 기록에 “進次今堗城(今尙州白華山)”이라 보이므로 白華山의 古石城이 바로 금돌성(今突城)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三國史記의 기록을 중심하여 諸文獻의 관계 기사를 종합해 보면…….

武烈王 때에 이르러 王 7年 7月 (660 A. D)에 太子 법민(法敏)에게 命하여 大將軍 金庾信 將軍 品日 欽春 등과 더불어 5萬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도록 하고 王은 금돌성(今突城)으로 행차하였다.

그 후 武烈王의 태자인 法敏이 백제의 항복을 받은 후에 “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所夫里城)에 이르러서 弟監天福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전승을 알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헌상의 사실은 현지 조사에서 “宝門, 대궐터, 내. 외 석성(內. 外 石城)” 등의 존재와 구조 및 조성, 축조 방식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검토해 볼 때의 상황에서 실감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상과 같이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에 관하여 문헌의 조사와 현지답사를 통하여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때 그 行軍大摠管營으로서의 今突城, 이것은 곧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今突城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신라 古城內에는 당시의 많은 遺跡이 남아있다.

신라의 古城이고 문헌에도 뚜렷한 존재, 역사적인 古城, 城內에 산재한 여러 유적지를 고찰해 볼 때 이렇듯 중요한 “백화산(白華山) 금돌성(今突城)”은 하루 빨리 국가 史蹟으로 지정하여 史蹟地 보호의 시책에 따라 보존책이 강구되어야할 것이다.

따라서 古城은 물론이요 古城內의 유적들을 보수 복원하여 앞으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책도 마련해야할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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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부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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